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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항일운동의 성지 소안도2019-05-20 17:46
카테고리문화재지킴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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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지도 등대 습격 의병의거' 110주년

항일운동의 성지 소안도를 가다  


5월 무진주문화재지킴이 캠페인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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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도의 옛 이름은 '자지도(者只島)'이다. 1909년 2월 24일 당시 '자지도 등대 일본인 습격 의거'는 올해로 110주년이 되었다.1886년 왜인 거주지 방화사건과 함께 소안도는 항일운동의 발신지이다. 함경도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3대 항일운동의 성지로 불리는 소안도에서는 모든 가정이 일 년 내내 태극기를 게양하며 조국독립을 위해 단결했던 당시 소안도 주민들의 항일정신을 기리고 있다. 지난 휴일 무진주문화재지킴이(대표 이근섭) 회원들이 우리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고 ,가꾸어 가자는 일환으로 소안도와 당사도의 항일유적지 현장에서 문화재보호 활동을 펼쳤다.

 


​완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소안도는 1627년 해남에 이진진이 설치되면서 제주를 왕래할 때 반드시 거쳐 가는 섬으로 풍랑 길에 안전한 곳의 소안(所安)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섬 전체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미라리 상록수림과 맹선리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구 당사도 등대는 등록문화재이다. 기암절벽과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다운 당사도 등대 주변은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촬영지가 되기도 하였다.

 

소안도는 육지와 제주를 잇는 지리적 중요한 항로에 위치하여 외부세계와 근대문명을 접하며 일찍부터 신교육이 시작되었다. 민족의식과 역사의식 속에 하나의 섬에서 20명의 독립유공자와 수많은 애국지사가 배출되었다. 1909년 당사도 등대 습격 의병의거를 비롯하여, 13년에 걸친 토지 소유권 소송 승리와 사립소안학교 설립, 수의위친계, 소안배달청년회 등 다양한 항일조직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소안주민 약 6천여 명 중 '요주의 인물이' 이 8백여 명에 이르는 등 마을 주민들은 순사의 심문에도 일절 대답하지 않는 불언동맹으로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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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면의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은 1990년 6월 5일에 세워진 것으로 비자리의 갯돌을 쌓아 만들었다. 소안 면민들의 성금으로 검은 돌과 하얀 돌들을 높이 8m, 폭 4m로 쌓아 건축하였는데, 검은 돌은 일제의 탄압을, 하얀 돌은 우리 백의민족의 순결함을, 세 갈래로 솟아 오른 탑 모양은 일본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상징한다. 1938년 춘경원당 사건으로 정남국 등 소안도 지도자들이 신의주 감옥에 갇히자 이들의 고초를 생각해 소안도 사람들은 엄동설한에도 요를 깔지 않고 잠을 잤으며, '옥중가'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평안북도 마지막 끝 신의주 감옥아 이 세상에 생겨 난 지 몇 해 되었나

이제부터 너와 나 둘 사이에 잊지 못할 관계가 생기었구나

앞뒤 살펴보니 철갑문이요 곳곳에 보이는 것은 붉은 옷이라

슬프도다 감옥에 있는 우리 형제들 이런 고생 저런 고생 악행 당할 때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하나 장래 일을 생각하니 즐거웁도다

여보시오 같이 나갈 우리 앞 길에 추호라도 낙심말고 같이 나가세"


1923년 사립소안학교 여학생 교련모습. 사진/소안항일운동기념관

이 노래는 소안 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그리고 마을 야학을 통해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주민들이 불러왔으며, 소안도 주민들은 민요보다도 옥중가, 혁명가, 독립운동가, 애국가를 더 많이 불렀다고 한다. 일제하 소안항일 운동은 소안도 출신 송내호, 김경천, 정남국 등에 의해 주도 되었으며, 1913년 중화학원이 설립되고 1922년 5월 사립소안학교 설립이 인가되었다. 일본이 세운 공립보통학교와 대립하였으며, 일장기를 달지 않고 독립군과 사회주의자를 양성한다는 이유로 1927년 5월 사립소안학교가 폐교 당했다.

 


당사도는 25세대 40명이 살고 있는 등대섬으로, 소안도 서쪽 약 3.5km, 완도항에서 20.8km의 해상에 위치한다. 섬 모양이 '지(只)'자와 비슷하다 해서 '자지도(者只島)'라 불렀으나 일제강점기에 '항문도(港門島)'라 했고 해방후 자지도의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1980년대에 '당사도(唐寺島)'로 바뀌어 부르고 있다.





남쪽 끝에 있는 당사도 등대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1월 일본이 본격적인 대륙 침략의 기반확충 및 자국 상선의 항해를 돕기 위해 설치하였는데, 그해 2월 24일 소안도 동학군 출신 이준화 외 5인이 등대를 습격하여 일본 등대원을 타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한 이른바 ‘자지도 등대 왜인 습격 사건’의 현장이다.



일본은 1876년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주요 항구의 개항, 해안 측량권, 해도 작성권, 개항장에 거주한 일본인의 치외법권 등을 요구하면서 강제 통상을 추진하였다. 이런 무리한 요구를 강행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동해와 서해, 남해에 일본 선박을 항행토록 하였는데, 일본 선박의 안전 항해를 돕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나라 남단의 자지도에도 등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현장에는 등대 습격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1997년에 세운 '항일전적비(抗日戰績碑)'가 있고, 옆에는 일본이 세운 '조난기념비(遭難記念碑)'도 함께 있는데, 파손된 비에는 "등대 간수가 1909년 적의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라는 요지의 비문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역으로 이 의거에 참가했던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이 지방 항일 운동을 증언해 주고 있는 중요한 사료로 보존하여 역사교육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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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도 등대는 태평양 전쟁 시 소안도, 보길도, 노화도 사이의 해협 수로가 해군 함정들의 군사 요충지로 이용되면서 전함들의 입출항 시 주요한 물표가 되었다. 지금의 등대는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 전투기 공격에 대파되었다가 1948년 새로 지어진 것으로 등탑은 9.4m 높이의 백색 원형 콘크리트 구조이다. 내부에는 사다리가 나선형으로 설치되어 있고 외부에도 등롱에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2008년 21m 높이로 새 등대가 세워졌다.

 


​광주의 옛 이름을 딴 무진주문화재지킴이는 매월 셋째 주말과 휴일에 문화재보호 자원봉사 활동을 11년째 즐기고 있다. 지난 1월엔 땅 끝 해남 달마고도의 미황사와 도솔암에서 시무식을 하고, 3월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냈던 정읍 내장산의 용굴암과 은적암을 답사하였다. 두 달에 한 번은 지역에서 주민들과 문화재자원봉사 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처럼 의미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 문화재보호 활동 캠페인도 꾸준하게 펼쳐가고 있다.

 


 

#항일운동. 소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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