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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400년을 이어온 남양주시 변응성 장군 군웅제 2019-06-07 09:26
카테고리문화재지킴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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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현충일...
남양주시 조안면 슬로시티협의회와 
변응성 장군 묘역에 대하여
현장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역사 이야기 길 3.8km..'
슬로시티 길은 경기도(50%)와 남양주시(50%)의
예산으로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매년 음력 10월 1일 진중리 마을에서는 변응성 장군에 대하여 군웅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400년을 이어온 변응성 장군 군웅제는 마진, 진중리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며 변응성 장군과 임진왜란시 의병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혼백을 위로하기 위한 군웅제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왜적 3만을 말7필과 3천의 병사로 물리치신 분이며 마진산성은 운길산역 앞에 위치해 있으며 묘역도 변응성 장군이 태어난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 마진산성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 산5-1번지에 있던 조선시대 산성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邊應星) 장군의 전적지로, 말로 진을 쳤기 때문에 마진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또한 이곳에 청동으로 만든 말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전쟁에서 공로를 세우는 한편 백성을 사랑한
양혜공 변응성(邊應星)장군
 
* 생애 및 활동
양혜공 변응성(邊應星,1552~1616)장군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변응성은 1552년(명종 7) 3월 29일 부친 변협(1528~1590)과 모친 화순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변협은 무과로 급제하여 해남현감에 재임 중이던 1555년(명종10)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해남으로 침범해 온 왜선(倭船) 600여 척을 격퇴시켰으며, 1587년(선조20)에는 전라우방어사(全羅右防禦使)로서 녹도(鹿島)·가리포(加里浦)의 왜구를 격퇴 시켰으며, 변방의 10여 군현을 순시하며 산천 도로의 형세를 조사하고 도표로 만들어 적침에 대비토록 하는 등 평생 무관으로서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다. 


변응성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부친의 영향을 받으며 무관의 길을 가고자 결심하였다. 1579년(선조 12) 2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선전관(宣傳官)·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용강현령(龍岡縣令)·함종현령(咸從縣令)·장단부사(長湍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선조가 무신 가운데 차서(次序)를 막론하고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였을 때 이진(李)·유홍(兪泓)·신립(申砬)에 의해 추천되었다. 1590년(선조 23) 통정대부(通政大夫) 강계부사(江界府使)로 평안북도 북동부에 있을 때 부친상을 당해 관직을 떠나 시묘살이를 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미처 복제(服制)를 마치지 못하였음에도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어 임지인 경주로 갔으나 이미 왜군이 경주를 점령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다른 지역인 경상우도수사(慶尙右道水使)가 되어 왜군 격퇴에 힘썼다.

 

1593년(선조 26) 서애  류성룡(柳成龍) 재상의 천거로 경기방어사(京畿防禦使)에 제수되었으며, 1594년(선조 27) 광주(廣州)·이천·양주(楊州) 지역 산간에 출몰하는 토적(土賊)을 토벌하였으며, 한강 상류 용진(龍津)에 주둔하면서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목책(木柵)을 구축하고 훈련을 시켰다.

 

1596년(선조 29) 용진과 여주(驪州) 파사성(婆娑城) 수비에 힘쓰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충청병사(忠淸兵使)에 재임 중에 역옥으로 갇힌 이위빈(李渭濱)의 옥사(獄事)를 제대로 심문하지 않았다는 죄로 1599년 10월 파직되었다. 1603년(선조 36) 경기방어사 겸(兼) 수원도호부사(水原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독산성은 임진왜란 중에 경기관찰사 유근(1549-1627)에 의해 4일간 공역으로 한 차례 수축되었으나 공역이 너무 단시간에 급하게 이뤄져 곧 허물어 졌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2년(선조35년) 수원부사를 페하고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면서 변응성(邊應星)을 방어사로 임명하여 석성(石城)으로 수축도록 하였다.

의정부 좌의정을 지낸 월사 이정구(1564-1635)가 1603년에 지은 「진남루중수기」에 의하면 변응성이 성을 높게 쌓고, 도랑을 파고 깊은 샘을 만드는 한편으로 밭을 갈아서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였고, 궁노(弓弩), 석거(石車), 포화(砲火), 기계(機械) 등의 무기를 설치하여 틈나는 대로 그 군대와 함께 공격과 방어하는 비책과 말달리며 활 쏘고 격랄(擊剌 치고 뜀) 등의 기예를 훈련시켰다고 한다.


중수기 기문을 더 살펴보면, ‘그리하여 1년 만에 독산성 내에는 200여 호의 거주민과 사찰이 들어섰고, 관청 건물이 100여 구(區)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임금에게 알리매 임금께서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그 군사를 먹이게 하고 그 재주도 사열하라 명하였다. 임금께서 기뻐하시며 사졸들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리셨고, 변응성에게는 특별히 말을 내리시며 따뜻하게 권장하셨다. 


이에 군심(軍心)이 기뻐하고 대중들의 뜻이 굳고 진용이 정돈되며 기치(旗幟)가 일신하여 엄연히 경기 지역을 보위하는 큰 관문이 되었다. 부지런하게도 변응성은 성 남쪽 모퉁이의 절벽에 초루(譙樓)를 세워 손님과 오가는 나그네를 접대하는 장소를 만들었다. 꽤 넓어 즐길 만 하였으니 그 애명(愛名)을 진남루(鎭南樓)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기에 이 성의 전말을 적는다. 


때는 만력31년 계묘(선조36년, 1603년) 늦가을에 월사(月沙) 이정구 적는다.’ -[水原郡邑誌,1899년]-
1604년(선조 37) 전라도병사(全羅道兵使)에 제수되었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1606년(선조 39)함경남도병사(咸鏡南道兵使)에 제수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12), 한성부좌윤(漢城府佐尹), 평안병사(平安兵使)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숙마 한 필을 하사 받았다. 이어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었다.

 

1609년(광해군1) 11월 경기수사(京畿水使)에 제수되었다. 1611년(광해군 3)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되고, 사 당상(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612년(광해군 4) 8월 동지(同知)에 재임 중이던 변응성에게 녹훈이 내려졌다.20) 그러나 당시 변응성은 녹훈 사양 상소를 올리면서 자신과 함께 행동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여 그들을 녹훈되게 하였다. 


그러자 외람되게 책훈(策勳)하는 반열에 참여하였다며 지탄하는 상소가 거듭 이어졌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 모함으로 역모죄에 걸려 친국(親鞫; 임금이 중죄인을 심문함)을 받기에 이르자 무신으로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억울하다며 공초하였다.21) 그리고 그날로 무죄가 인정되어 석방되었다.22) 


그 후 변응성은 다시 훈련도감대장이 되었으나 거듭 이어지는 시기로 인해 다시 파직되었다.23) 1614년(광해군 6) 7월 다시 훈련도감대장으로 수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24) 1616년(광해군 8) 생을 마감하였다.


그 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1796년(정조 20) 정조로부터 시호(諡號)가 내려졌는데 양혜(襄惠)였다.25) 이는 그가 임진왜란 때의 행적을 높이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1)
참조: 1) 임진왜란훈록 [전쟁에서 공로를 세우는 한편 백성을 사랑한 변응성] 1쪽 ~ 6쪽 성균관대 이은영(李恩英) 교수
 
양혜(襄惠)란 시호는 ‘전쟁에서 공로를 세우고‘양(襄)’ 백성을 사랑하여 베풀었음 ‘혜(惠)’을 의미한다. 


그가 역사에 올바른 평가를 받는 데는 그의 사후 180년이 지난 후인 1796년(정조20)에 이르러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의 생애 전반은 물론 그가 경기방어사로서 독산성에 머물며 치적을 쌓았던 오산과 태어나고 죽어서 혼백을 묻은 그의 고향인 남양주시 수종면 진중리에서 조차 외면당하고 있다. 


오늘날 변응성장군의 치적이 오산에서는 권율장군에게 묻히고, 그의 고향인 남양주시 조안면에서는 다산 정약용에 묻히면서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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