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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전남 나주시 일원 누정답사 및 모니터링 활동2024-07-24 13:15
카테고리문화재지킴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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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 일원 누정답사 및 모니터링 활동


일시 : 2024년7월21일

장소 : 나주시 소재 누정답사 (쌍계정, 영모정, 장춘정, 석관정)

참가자 : 무진주국가유산지킴이 정회원


오랜 장맛비와 붙볕더위에 높은 습도까지 합세하여, 계획된 7월의 누정답사 및 모니터링 활동에 제재를 요하는 전형적인 여름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무진주국가유산지킴이 회원님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2024년 계획활동으로 홀수달에는 누정답사를 계획하여 진행하고 있는데, 7월 활동지역으로 나주시를 선정하여 진행하였습니다.(진행담당 : 김도연팀장)

김팀장님의 사전조사를 보면 나주시에는 오랜역사만큼이나 누정과 고택등 목재문화재가 다른지역에 비해 많은편이었습니다. 누정은 16개가 조사되었으며, 문화유산으로 지정된것은 6건에 불과하여, 문화유산 지정 및 보존관리가 필요한 상태인듯 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무진주지킴이의 탯자리인 유애서원에 모여서 경장각(석탄이신의선생를 모신 유애서원의 재각)의 모니터링을 시작으로 나주시 누정답사길을 시작하였습니다.

첫번째 호남의 3대 명촌마을이라는 금안마을에 있는 쌍계정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을입구에 위치에 있어서 모정의 느낌이었으나, 오래전부터 향약을 유지해오던 마을에 회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어 유지관리가 잘되고 있었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나주를 대표하는 정자라고 할 수 있는 영모정에 들렸습니다. 이곳은 나주(?)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 정자인데 외부에는 개방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씨속에 장춘정, 석관정 등 4곳을 들려는데, 개방되지 않거나 관리가 미흡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오랜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지만 현재의 관광목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모습에 조금은 안타깝고 아쉬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나주시 4대문 : 남고문<1993년>, 동점문<2006년>, 서성문<2011년>, 북망문<2018> 복원된 상태임


쌍계정 雙溪亭


나주 금안 마을의 쌍계정(雙溪亭)은 정가신(鄭可臣)이 1280년 세운 정자이다. 당시 쌍계정은 정가신·김주정·윤보가 모여 심신을 연마하던 곳이라 삼현당(三賢堂)으로 부르기도 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신숙주·신말주와 정서(鄭鋤)·김건(金鍵)·홍천경(洪千璟) 등 당대 대표적인 학자들이 쌍계정에서 학문을 토론하고 공동의 규약을 정하여 미풍양속을 실현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정가신의 나주 정씨, 정서의 하동 정씨, 김건의 서흥 김씨, 홍천경의 풍산 홍씨 등 4개 문중에서 대동계를 하며 쌍계정을 공동 관리하고 있다. 금안 마을은 호남 3대 명촌으로 불린다.

호남 지역에 3대 명촌이 있다. 전남 영암의 구림 마을, 전북 정읍의 신태인 마을, 그리고 전남 나주의 금안 마을이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마을은 풍수지리의 좋은 입지조건과 오래도록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경우가 많다. 금안 마을도 마찬가지다. 고려 때의 정가신, 조선 때의 신숙주와 같은 인물이 이곳 출신이다. 특히 정당문학을 지낸 정가신은 금안 마을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현재의 지명인 ‘금안(金鞍)’도 그가 원에 사신 갔다가 원 황제로부터 금으로 만든 말안장을 하사 받았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나주 금안 마을의 쌍계정(雙溪亭)도 설재(雪齋) 정가신(鄭可臣 ; 1224~1298)이 1280년(충렬왕 6)에 세운 정자이다. 당시 쌍계정은 정가신·김주정·윤보가 모여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어서 삼현당(三賢堂)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신숙주·신말주와 정서(鄭鋤)·김건(金鍵)·홍천경(洪千璟) 등 당대 대표적인 학자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토론하고 공동의 규약을 정하여 미풍양속을 실현하였다.

그 후에도 전통이 이어져 정가신의 나주 정씨, 정서의 하동 정씨, 김건의 서흥 김씨, 홍천경의 풍산 홍씨 등 4개 성씨가 대동계를 해왔다. 금안 마을의 동계 관련 소장문서도 51점이나 남아있다. 근래에는 네 문중에서 쌍계정을 공동 관리하며, 1957년 ‘사성강당(四姓講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처럼 오래도록 여러 성씨의 문중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며 미풍양속을 이어가는 누정은 거의 없다. 1938년 쌍계정을 중수할 때 서흥 김씨인 김기우(金基禹)가 지은 시에도 잘 드러난다.


영모정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나주 영모정은 나주임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인 1520년(중종 15)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이 창건하였고, 이 지방 출신의 명문장가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기던 유서깊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歸來亭)이라고 불렀으나, 1555년(명종 10)에 임붕의 두 아들 임복과 임진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재건하면서 영모정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82년과 1991년에 다시 중건·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팔작지붕으로 된 무고주 5량가(樑架)이다. 다듬돌로 바른층쌓기로 된 2단기단위에 덤벙주춧돌을 놓고 2m 가량 되는 원형 장대석을 세운 다음 두리기둥을 이었다. 그 위에 보를 걸치고동자기둥을 세워 종보 위에 판대공과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올린 견실한 구조를 갖추었다.

왼쪽 1칸은 온돌방, 오른쪽 2칸은 마루방인데 4면창호아래머름을 대었고, 정면 3칸의 각띠살문좌우에 벽널을 대어 건물 외관(外觀)을 다듬었다.

영모정은 비교적 세워진 시기가 빠르고 정형화된 모습 때문에 정자 건축의 규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위에는 400년된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어 주변경관이 아름답다. 또한 이곳 회진에서 출생하여 조선시대 문장가로 이름난 백호 임제가 시를 짓고 선비들과 교류하던 공간이다. 지금은 나주임씨 문중종회소로 이용되고 있다. 밑 구릉에는'귀래정 나주 임붕유허비' '백호임제선생기념비'가 있다

임제는 정6품 평안평사를 제수받고 부임하는 길에죽은 황진이 묘지에서 시조를 읊다가 파직됐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백호 임제가 병으로 사망한 기생 황진이를 추모하며 읊었다는 시조)


장춘정 藏春亭


장춘정(羅州 )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죽산리 화동마을에 있는 정자이다. 2002년 4월 19일전라남도의 기념물제201호로 지정되었다.

장춘정이라는 정자명은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숲과 사시사철 피는 꽃들이 항상 봄을 간직한 듯하다는 의미이다. 장춘정을 중심으로 문인과 무인 등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영산강 권역의 대표적인 정자이다.

장춘정은 마을 가까이의 경승지에 건립된 유실형(有室形) 정자이다. 처음 건립은 1561년에 고흥류씨 유충정(1509∼1574)이며, 1818년과 1930년에 중수한 건물로서 건립연대가 오래되었으며, 옛 모습을 잘 보전하고 있다.

뼈대가 굵고 가구구조가 건실하며, 치목이 잘 되어 있다. 그리고 대청의 우물마루, 빗살창, 선자 서까래나 활주 등에서 세련미를 보인다.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건립의 유서나 이곳을 중심으로 인문활동을 했던 인물(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원기 오상, 풍암 임복, 사암 박순, 고봉 기대승, 손재 박광일, 백호 임제)들의 면면을 볼 때 영산강 권역의 대표적인 정자로 볼 수 있다.

장춘정을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문인 학자들이 교유하였다. 면앙 송순(1493~1583), 석천 임억령(1496~1588), 원기 오상(1512~1573), 풍암 임복(楓巖 林腹, 1521~1576) 사암 박순(1523~1589), 고봉 기대승(1527~1572), 연과 박개, 손재 박광일, 백호 임제(1549~1587), 안위(安瑋), 설봉 강백년(1603~1681) 등이 제명을 남겼다.

유충정은 무과에 급제(1534년 중종29)하여 부안·강진현감, 김해부사, 장흥부사, 온성부사 등의 수령을 지낸 뒤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강상(江上)에 장춘정을 지었다

유충정은 본관이 고흥(高興)으로, 자는 중한(仲翰), 호는 장춘이다. 아버지는 유해(柳瀣)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전라좌수사 이종인(李宗仁)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안·강진현감, 김해·장흥·온성의 부사를 지냈다. 부안현감 재직시에는 서해바다의 해적을 일소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는 당시 순찰사 안위(安瑋:1491~1563)와 함께 칠산 앞바다에서 왜적의 전함을 나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온성부사 재직시에는 북방의 육진을 평정하여 북관을 안전하게 했으나 이후 낙향하여 장춘정을 짓고 유유자적하였다. 무인직의 벼슬을 지냈지만 문인적 소양이 다분하였다.

장춘정의 설립 당시의 모습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쓴 「장춘정기(藏春亭記)」를 통해 잘 알 수가 있다. 그의 문집 『고봉집(高峯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전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 유군(柳君) 중한(仲翰)이 죽포(竹浦)의 굽이에 정자를 세웠는데, 돌을 베개로 삼고 맑은 물을 굽어본다. 높은 바위가 좌우에 늘어서 있고 무성한 숲이 비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아름다운 화목(花木)들을 나란히 심어 놓고는 그 현판에 써 붙이기를 ‘장춘정(藏春亭)’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정자의 서쪽 노는 땅을 개척한 뒤 작은 집을 짓고 ‘매귤(梅橘)’이라 써 붙였는데, 모두 난간을 세우고 단청(丹靑)을 입혀서 영롱하고 완연하며 아늑하고 상쾌하여 별천지와 같다. 이에 여러 명승지에 대해 쓴 시편(詩篇)을 판각(板刻)하여 편액을 걸

고, 아울러 나의 기문(記文)을 걸어 놓으려고 하였다.


석관정 石串亭


옛 이름 '돌고지>돌곶'으로 강쪽으로 바위가 툭 튀어나온 곳, 즉 벼랑에 위치한다는 의미이다.

1530년(중종25) 경 함평이씨 함성군 이극해의 증손인 신녕현감 석관(石串)이진충(李盡忠)이 정자를 창건하여 석관정(石串亭)이라 정제(亭題)하였다. 1755년(영조31) 8세손 이시창(李時昌)에 의하여 초가(草家) 두어간을 세웠다. 1906년 14세손 춘헌의 출연으로 후손 돈학 목헌등이 협력 중건하고, 1937년 중수하고, 1998년 정면 2간·측면 2간 석조8작 골기와 지붕으로 중건 '석관정기(石串亭記)'를 비롯한 기문과 시문을 적은 현판들이 걸려 있다.

영산강 제3경으로 선정된 석관정은 1530년 세운 정자로,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후손들이 중건을 거듭한 곳으로 알려졌다. 영산강의 비경을 발아래 두고 있으며, 탐스러운 동백나무와 100년 이상 된 멋스러움을 간직한 고목들이 그 주위를 감싸고 있다. 석관정 아래에는 황포돛배가 오가던 옛 나루터를 복원한 나무 데크가 여럿 줄지어 마련돼 있다. 잔잔하게 흐르는 영산강의 물결을 바로 앞에서 바라볼 수 있어 피크닉과 낚시를 즐기는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영산강 절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고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 강 쪽으로 '나주제일정', '영산강제일경'이라는 현판이 있다고 한다.

참고문현

『호남문화연구』 15(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1985)

『문화유적총람』(전라남도, 1986)

『나주군문화유적지표조사』(전라남도, 1986)

『지정문화재조사보고서』(전라남도, 1988)

『전국문화유적총람』(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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